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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치과의사협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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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권 11호2014.11

18세기 피에르포샤르의 ‘전문가주의’와 계몽주의

  • 작성자이주연

투고일:2014. 9. 29                심사일:2014. 9. 29                게재확정일:2014. 10. 29

 

 

18세기 피에르포샤르의 ‘전문가주의’와 계몽주의
세브란스치과의원, 대한치과의사협회 역사편찬위원
이 주 연

 

 

ABSTRACT


The Professionalism and Enlightenment of Pierre Fauchard,

a scholar of 18th century Severance Dental Clinic
Jue-Yeon Lee, D.D.S., M.S.D., Ph. D.

 

This literature considers Pierre Fauchard? exploits under historical context of the enlightenment movement and development of the surgery during 18th century in France. <치과의사 Le Chirurgien Dentiste, ou Traite des dents>, a vast collection of the former and contemporary dental knowledge, technologies, and skills, established Modern Dentistry. To emphasize the professionality of dental treatment and actions involving it, Fauchard replaces the title ?ental expert?with ?tomatologist, or Le Chirurgien Dentiste?
As professionalism tried to contribute to the public interest by sharing dental knowledge and technolgies, it had become a model for the dentists. Moreover, the professionalism has been accepted as an important value throughout the manufacture crafts era and the modern capitalist industrial society. Also the principles of liberty, equality, and tolerance founded during enlightenment movement, which is based on empirical positivism and rational reason, has become the legal basis of modern nations. In order to resolve the contradiction or conflict between ?iberty and equality?by ?olerance for the public benefit? Korean dentists need develop professionalism.

Key words : Enlightenment, Pierre Fauchard,  Professionalism

Corresponding Author


Jue-Yeon Lee. DDS, MSD, PhD.
Severance dental clinic, 722-8, Guro 2-dong, Guro- gu, Seoul, 152-871, Korea
Tel : +82-2-854-0028, C.P : +82-10-9148-0517, Fax : +82-2-854-0027, E-mail : mar123a@hanmail.net

 

Ⅰ. 서론
21세기 한국의 치과계는 정부의 치과 의료 복지강화와 영리화 추진 정책, 누적된 치과의사 공급과잉과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치과의사의 대의(大義)인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가 시장원리에 따른 무한 경쟁이나 법적 공방, 여론에 의해 추락할 위험을 피하고 현실 속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집중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본고에서는 피에르 포샤르(Pierre Fauchard)가 18세기에 ‘근대 치의학문의 독립’과 ‘전문가주의’로 치과의사의 위상을 확립에 기여할 수 있었던 동력을 크게 시대적 배경과 그의 저서인 <치과의사, 치의학 개론 Le Chirurgien Dentiste, ou Traite des dents>1)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어떻게 ‘치의학의 독립’과 ‘근대성’이 시작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봉건제적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시민사회로 이행되는 시대변화를 배경으로 외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와의 연관에 주목할 것이다.
치과의사들을 위한 치의학 이론과 임상실제를 다룬 <치과의사>에서는 당대 치의학의 특징과 한계, 후대에 끼친 영향을 ‘전문가주의’의 관점에서 정리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근대에서 탈근대로 전환되는 오늘날 전문가주의와 계몽주의가 끼치는 영향과 봉착한 문제들을 파악하고 그 가치를 회복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18세기 프랑스

1) 정치, 경제, 사회구성의 변화
르네상스 이후 서유럽의 절대왕정은 종교개혁과 중상주의의 승리가 정치로 연결된 것이었다. 가톨릭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패권이 기울면서,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독일의 절대왕조가 강화되었다. 특히 피에르 포샤르(1678~1761)가 태어난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72년간 절대군주로 집권(1643~1715)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었다. 최초로 국가가 육해군 징병과 상비군 훈련을 담당하는 근대적 의미의 군대조직을 갖추고 대외 침략전쟁을 수행하였다. 국내적으론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국왕이 제반 행정체계를 직접 장악하고, 성직자(제1계급), 귀족(제2계급)들은 베르사유 궁전의 사치스런 생활에 탐닉하게 하여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반면 화폐 중심의 상공업을 육성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하급귀족이나 시민계층에서 관리를 채용하였다. 상인 출신으로 재무와 해군, 국무장관을 역임한 콜베르(1619~1683)는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외국 기술자들을 영입하고, 매뉴팩처(가내 또는 공장제 수공업)를 발달시키는 한편, 해군학교와 함선을 정비하고, 프랑스에서 예술과 철학, 과학의 결실이 맺어지도록 했다. 이에 ‘금석학 및 문학아카데미(1663)’, 데카르트와 파스칼이 소속된 ‘왕립과학아카데미(1666)’, ‘왕립건축아카데미(1671)’가 창설되고, 회원들에게 연금이 부여되었다.  로코코와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궁정과 파리의 살롱 및 대중문화가 최고조에 이르렀고, 불란서어가 국제어로 통용되었다2). 이 과정에서 새로운 중산계급으로 부상한 부르조아(bourg eoisie)들이 궁정과 파리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하층 농민과 달리 재산과 학식을 꾸준히 상승시켜온 은행가와 법률가, 의사, 상인, 수공업자, 문예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궁정귀족이나 도시민들을 상대로 직업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향상과 정치 참여를 열망하고 있었다. 18세기의 서열화 된 의학계에서 치의학의 독립과 발전을 가져온 커다란 흐름은 전쟁터에서 발전된 외과학에서 유래되었다.
 
2) 외과학의 발전을 통한 치의학의 독립.
중세 수도원에서 외과수술을 금지한 이후 유럽의 의료계는 서열화되어 있었다. 파리대학 의학부는 1271년부터 교수단에 속해있는 내과의사를 상층으로, 외과의사, 약사 순으로 3분화되어 있었다. 최하층은 이발외과의(barber surgeon)로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길드 조직에서 도제식으로 양성되는 장인이었다. 긴 예복을 입은 외과의사들은 1533년 이래로 생콤학원(Coll럊e de St. C셫e)에서 교육을 받아 대학교수와 같은 권위를 행사하고 싶어 했으나, 의과대학 교수들은 외과의사들을 무시하였다. 그리고 외과의사들은 이발외과의들을 무시하였다. 이러한 이발외과의들의 의학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가 격상한 것은 유럽 각국의 패권 다툼과 식민지 쟁탈전 속에서였다.
이발외과의에 대한 수요는 전쟁터와 항해 중인 배에서 제일 많았다. 참전 군의관과 배의 선의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고 외과의사의 정체성은 주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발전했다. 이발외과의들의 수련의 많은 부분은 군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수술을 하는 것 뿐 아니라 장교들에게 면도까지 해 주어야 하는 신분이었다.
16세기 프랑스의 앙브루와즈 파레(Ambroise Par?1510~1590)역시 이발외과의로 군의관으로 참전(1536)했다. 이탈리아 전에서 총상을 끓는 기름으로 지지는 방법이 아닌 연고를 제조하여 처방하였고,  혈관을 묶어서 지혈하는 법을 발견했다. 파리대학(1545~)에서 연구한 뒤 국왕의 수석외과책임자(1552~1563)를 지냈다. 외과학, 산과학, 해부학 및 치과치료에서 다양한 기구 개발과 술식을 제시하였고, <외과학 5편>등의 저서를 남겼다.
파레와 같은 이발외과의들이 외과학을 발전시켰음에도 외과의사와 이발외과의 간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루이 14세는 그 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1655년 칙령으로 모든 외과의들이 단일 조합에 가입하게 했다. 단일 조합의 지위는 여전히 낮았지만 장점도 있었다. 외과의사들은 이발외과의들의 실질적인 경험을 활용하게 되고, 이발외과의들은 외과의사들과 연합함으로써 신분 격상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외과의사들의 사회적 지위가 전체적으로 높아진 것은 1686년에 루이 14세의 치루 수술이 성공하는 사건을 통해서였다.
루이14세는 변비를 심하게 앓아 항상 연하제를 쓰고, 관장도 연간 212회 정도나 해야 했다. 결국 치루(anal fistula)가 생겨서 배변 시 통증이 심하고 고름이나 피가 나와 정치에 나쁜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왕의 치루 치료는 제일 먼저 왕실 내과의사가 했다. 하지만 내과의사가 제공한 모든 연고와 팅그제가 효용이 없었다. 절망한 루이14세는 왕실 외과의사인 샤를 프라소와 펠릭스(C. F. Felix)에게 수술을 의뢰하였다. 펠릭스(Felix)는 왕을 수술하기 전에 하층 계급의 치루 환자를 대상으로 수술연습을 하였다. 하지만 실패가 많았고, 사망자도 있었다. 하지만 1686년 펠릭스는 왕의 치루 수술에 성공했다. 왕은 감사의 표시로 펠릭스(Felix)를 귀족으로 봉하였고, 땅을 하사하고, 당시 왕실 내과의사들이 받는 사례금의 3배에 해당하는 15,000 루아도르(금화 30만 프랑)를 지급하였다. 이 사건은 펠릭스 자신 뿐 아니라 프랑스 외과의사들의 위상을 격상시켰고, 내과와 외과의 차별을 없애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3).
외과의사들은 자신들이 국가의 법에 의해 도시와 길드를 규제할 수 있도록 외과 임상 규제 입법 운동을 주도했다. 외과의사들 중 일부는 치아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치아를 주로 다루는 직종은 치과숙련가(dental expert)였다. 이들은 눈, 항문 등 몸의 일부만을 주로 다루는 이발외과의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베를린 정부 칙령(1685)보다는 늦었지만 파리 칙령(1699)에는 ‘탈장 수술자, 눈의사, 치과숙련가(dental expert), 접골사들은 수석왕실외과의, 보좌관, 네 명의 관리자, 의과대학 학장 앞에서 이론과 실기시험 치러야 진료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생겼다. 그 결과 파리에서 치과분야는 시험에 합격해야만 진료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파리 칙령에도 ‘참견꾼, 사기꾼, 돌팔이(quackery) 집단은 의료계에 속하지 않고, 벌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1743년까지도 파리 의과대학은 이발사들의 진료를 금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과의사들은 자신들을 이발외과의(barber surgeon)와 구별 짓고자, 공인외과의사(master surgeon), 선서외과의사(Sworn surgeon)등의 자격증이나 계약증을 발급해 갖기도 했다. 학술적이 역량을 높이기 위해 외과의사들은 르네상스 이후 발전한 생리학과 현미경 관찰, 사체해부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임상에 적용했다. 그 결과 파리의 생콤학원의 외과의사들은 앙드리(Deacon Andry)의 주도하에 내과교수단의 면전에서 강의실 문을 닫고 독립을 선언(1725)할 정도로 외과학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반면 프랑스의 내과의사들은 사변적인 논쟁에 빠져, 과학과 기술 분야의 발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과의사들은 몸과 손을 사용하는 외과나 산부인과학, 실험실의 작업에 대해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의과대학의 교육도 아랍의 저자들이 고대 그리스 의학을 번역한 책에 의존하였고, 소변검사가 성행하였다. 일부 계몽사상을 가지거나 왕립과학아카데미 등에서 활동하는 의사들은 경련이나 의식불명 등의 이상한 증상이나 유행병의 원인을 신이나 악마가 아닌 인간의 조직이나 장기의 이상, 현미경에서 관찰한 미생물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한편 왕실외과주치의였던 조르주 마레샬은 군사적 필요를 이유로 루이 15세의 승인을 받아 1731년 ‘왕립 외과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1750년에는 외과 실습학교도 설립되었다. 학술활동이 더욱 활발해진 왕립외과아카데미는 1776년 ‘왕립내과의사회’와 통합하게 된다.
이러한 외과학의 발전 속에 18세기 초반 치의학 분야는 외과학과 산업기술 발전에 힘입어 어느 정도 전문지식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포샤르의 <치과의사>가 3판까지 출간된 파리는 근대 치의학 발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도시로 부상하였다. 포샤르는 ‘어디에서나 치아와 구강분야를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고 있지만, 파리는 구강을 보기 좋게 만들고 치아결손을 메우고, 난치병을 낫게 하는데 최고의 완벽한 수준에 도달해있다. 외국의 왕자들, 지도자들, 지방 관료들이 젊은 외과의사를 파리로 보내 이 분야를 배우게 하지 않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라며 파리의 치의학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기존의 ‘발치사(tooth drawer)’를 대치할 치과의사(외과치과의,Le Chirurgien Dentiste, stomatologist)가 새로운 직업인으로 탄생하였다.
산과(産科) 역시 분만 겸자의 발명을 계기로 외과에서 독립하여, 파리에서 최초의 산과학 교육시설이 설립(1720)되었다. 영국의 윌리엄 스멜리(william Smellie, 1697~1763)는 파리 유학 후 런던에서 ‘남자조산원’으로 개업(1740)하여 산부인과 전문의사의 기반을 닦았다. 소아과의 경우 런던에서 암스트롱이 소아과 병원을 창립(1769)하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성 빈센트 드 폴(St, Vincent de paul)의 아동복지나, 앙드레(Andr?의 ‘아동의 불구 예방과 교정’에 관한 책 출간이 기폭제가 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에서는 경험적이며 대중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임상의료 분야에서 점차 성과를 높여 나갔다.

3) 과학발전과 계몽주의
17,18세기 서유럽의 자연과학과 철학, 사회와 산업의 변화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역동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17세기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626)과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경험주의가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Ren?Descartes, 1596~1650)의 합리주의와 종합된 것이었다. 외과개원의였던 존 로크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의 친교를 통해서 자연과학의 수리적 실험 방법을 받아들였다. 또, 애슐리 경의 수술 성공을 계기로 존 로크는 정치에 참여해 정부가 시민들의 자연법적 권리를 보장하도록 힘썼다. 이러한 영국의 경험론적 실증주의는 기초 과학 분야에서는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가 혈액순환을 발견해 생리학을 발전시키고, 레벤후크(Antony van Leewenhoek, 1632~1723)가 현미경을 통해 상아세관과 치태미생물을 밝힌 논문을 발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의학에 있어서는 시드넘(Thomas Sydenham, 1624~1689)의 임상의학과 존 헌터(John Hunter, 1728~1793)의 실험의학,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1749~1823)의 천연두에 대한 백신 개발로 발전하였다. 산업적으로는 아마추어 과학자들의 과학기술을 매뉴팩처 기계제조업과 발명에 응용하는 실용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대장장이였던 뉴커먼이 개발한 증기기관이 학자 출신 기술자였던 와트(1736~1819)에 의해 실용적인 증기기관으로 발전하면서 18세기 후반에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1715~1774)집권기에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영국 망명(1726~ 1727)을 통해 로크의 경험론과 뉴턴의 물리학과 인본적인 정치철학이 받아들여졌다. 절대군주의 통제가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과학 지식과 근대적 이성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계몽주의가 발전하였다. 이어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 1783), 몽테스키외(Montesguieu, 1689~1755),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볼테르와 함께 <백과전서파>로 활동하였다.
<백과전서> ‘과학, 예술, 기술의 합리적 사전’이라는 부제로 출판된 이 책들(1751~1772)발행)은 기존의 모든 지식들을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집대성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통용되도록 한 협동적인 작업이었다. 고위 관리들에게 예산 지원을 받아 편찬되어야 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전제군주에 대해서 경의를 표했다. 또 자연과학과 의학, 수공업기술과 산업기술의 발달에 대해 낙관적이고 실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출판업과 우편업무가 개선되어 과학문헌이 회람될 수 있었다. 귀족뿐 아니라 상인과 전문가들이 책을 읽었고, 과학 연구를 후원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러한 과학 기술의 진보에 힘입어서 프랑스 사회도 결국 자본주의 시민사회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지식을 교육 받은 시민들이 낡은 사고의 습관을 떨쳐버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공익에 기여하도록 교양했다. 하지만 <백과전서>의 출간은 순조롭지 못했다. 1752년에 나온 제 2권은 발행과 배포가 정지되었고, 점차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4). 그 동안 루이 15세는 잇따른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고를 탕진하였다. 그러고도 재정을 개선하지 못하여, 시민이하의 계층의 세금이 과중해졌다. 그러자 보다 광범위한 시민계층이 부르봉 왕조의 절대군주제를 비판하고 계몽주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봉건제에서 이탈한 보다 많은 계층들이 사유재산을 보장 받아야, 자유롭게 상품과 화폐를 교환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18세기 말엽 인간의 자유와 평등, 관용을 보장할 정치체제를 목표로 한 계몽주의는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고, 산업혁명에 따른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확립시켰다. 루이 16세(1774~1792) 역시 높은 국가부채를 시민계층에게 떠넘기려 했다. 이를 위해 신분회를 소집한 것이 프랑스혁명(1789~1794)의 도화선이 되어 부르봉 절대왕정은 끝을 맺는다.

 

2. <치과의사>에 나타난 전문가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

피에르 포샤르의 생애(1678~1761)는 전술한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ittany)반도에서 태어난 포샤르는 15세에 해군에 입대해 외과견습생으로 복무(1693~1696)했다. 당시 포샤르는 외과장교 포트르레(Alexandre Poteleret)가 괴혈병을  치료하는 모습을 많이 보고 익혔다. 괴혈병에 레몬과 오렌지가 유효하다는 것은 16세기 초 민간요법을 통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18세기까지도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 함대에서 괴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대에서 다수의 구강질환을 치료한 포샤르는 이후에도 잇몸에 생긴 괴혈병을 계피 보리차와 비타민, 허브액, 방향제를 조제해 치료했다. 제대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포샤르는 앙제(Anger)라는 도시에서 치과의사로 개업(1696~, 18세)했다. 그 후 20여 년간 진료일지를 쓰면서 수익성 좋은 치과의사로 살았다.
루이 15세 집권 초기 포샤르는 낭트, 렌, 투르 등으로 출장 진료(1716~1718)도 하고, 많은 지도급 의사들과 지식을 나누며 명성을 얻어 41세에 파리로 입성(1719)했다.
당시 파리에 있는 치과숙련가(dental expert)들 중 학식이 높은 의사는 소수고, 대부분 상류층 고객들의 외모치장이나, 보철, 치통제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부분 자신의 의료지식과 기술은 비밀로 하고 외부 유출을 막아서 진료업무상의 무능함이 양산되었다. 이러한 과학적 비밀주의나 전매처방은 중세 비밀주의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치과숙련가 뿐 아니라 대부분의 명망 있는 의사들은 비법공개를 꺼렸다.
파리의 코메디 프랑세즈(Comedie Francaise, 프랑스 국립극장) 거리에 개업한 포샤르는 견습생들을 가르칠 때 사용할 ‘치의학 교과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구강질환이나 해부학과 관련된 3가지 대표적인 저작들조차 치과의사가 시술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담기에는 피상적인 수준이었다. 위르뱅 에마르(Urbain Hemard)의 <치아의 정확한 해부학, 그 질병의 본성과 특징에 대한 연구, 1582>는 그리스 의학이론을 사체해부를 통해 검증하는 책이었다. 여러 명의 조산아를 해부해서, ‘유치는 태아가 섭취한 영양분에 의해 유치의 싹이 생겨 형성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정상 신생아에서는 ‘영구치가 우유나 강한 음식을 먹어서 생긴다’는 히포크라테스의 견해는 틀렸고, ‘책이 아니라 자기 눈을 믿어야 한다’는 갈렌의 진술이 옳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몽펠리에 대학교수면서 외과의사인 리비에르(Riviere, 1589~1655)는 치통 치료에 귀에 약물증기를 쐬어주는 중세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파리의과대학 해부학과 외과학 교수이며 루이14세의 왕실치과의사인 디오니스(Pierre Dionis -1718)역시 황산을 충치에 넣어 소작시키는 위험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베르사이유 궁전에 모인 귀족 중 노인들은 ‘의치 사용이 탄로 날까 입도 열지 못할’ 정도로 보철물의 유지력이 낮았다. 포샤르는 에마르와 리비에르, 디오니스에 관한 비판적 견해를 자신의 책에 담았다.
포샤르는 학술과 임상능력에 대한 평판이 좋아 귀족이나 부유한 부르조아 환자들뿐만 아니라, 저명한 의사 및 치과전문가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그는 여러 의사와 치과의사들과 인터뷰하고 의학 서적들을 모아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구강전문가로서 정통한 처치법에 관해 썼다5). 5년 만에 책을 완성(1723)하고 최고의 내과 및 외과의사, 왕실주치의들의 검토를 거쳐 1728년(50세)에 출판했다6). 이 책은 인근 유럽국가에도 빠르게 퍼져 1733년에 독일어 번역판이 나왔다. 포샤르는 초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임상결과와 확실히 일치하는 것들을(evidenced-based clinical dental medicine)수록하기 위하여 증보판(1746, 68세)을 냈다. 이듬해에는 파리의 번화가인 포부르 생제르맹(Faubouerg Saint- Germain) 코르들리에 거리(Rue De Cordeliers)에 새로 생긴 외과대학과 생콤의 반원형 계단식 강의실 맞은편으로 치과를 옮겨 환자진료를 계속했고, 83세(1761)에 근처 집에서 작고했다.
사망 당시인 1761년 파리치과의료인(Dentistes) 명부를 보면 외과의사 중 구강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3인을 ‘외과의 대가, Maistres en chirurgie’ 로 기록하고 있다. 하단에 30인의 치과숙련가(Dental Expert) 명단이 있는데, 그 곳에 피에르 포샤르가 기록되어 있다. 액텀(Walter Hoffmann-Axthelm)은 포샤르가 결국 ‘외과의 대가’가 되지 못해 <치과의사, Le Chirurgien Dentiste>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로저킹(Roger King)은 <치과의사>는 포샤르가 자신을 ‘치과숙련가’나 ‘외과의 대가’와 구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직업명으로 보았다7).
이글에서는 포샤르가 왜 평생에 걸쳐 <치과의사, Le Chirurgien Dentiste>라는 직업 명칭을  제목으로 한 책을 썼고, 그 가치는 무엇이며, 당대 계몽주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근대 치의학문의 독립
<치과의사>가 구강질환의 치료법을 체계적으로 다뤄, 당대 외과학의 변방에서 장인들의 수공업으로 폄하되던 치의학문을 치유적인 의술로 독립시켰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이 과연 어느 정도 근대적이고 과학적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게다가 계몽주의와의 관련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근대성과 과학성, 계몽주의와의 연관성을 살펴볼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백과사전식이다. 치의학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고대 히포크라테스와 갈렌 의학과 중세 이슬람의 아비센나 의학, 파레의 외과학을 위시하여 당대 유럽의 관련 논문이나 서적뿐 아니라 민간요법서, 당대 이발외과의나 발치사, 장인들의 기술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8). 전 시대와 다양한 계층의 학설, 임상예, 기술을 총망라하였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총체적이다. 또 18세기 초의 현실과 저자인 포샤르의 견해에 비추어, 기존 학설을 고찰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저자는 서문에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유능한 인물들의 시술에서 깨우침이 확산’되고, ‘아이디어라도 기록으로 전수되어야 더 새로운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성공의 모범을 보이고자’한다는 낙관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독자는 치과숙련가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 치과의사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의사로서 필요한 정규적인 지식과 기술을 충실하게 교습해주는 책이다. 저자는 ‘진지한 자세를 가진 사람들에겐 이에 대한 지식과 기술, 경험과 역량을 갖추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독려하고 있다. 이것은 자율적인 주체가 학습 경험을 통해 역량을 키워나가도록 하는 ‘역량중심의 교육’과도 일치한다. 일반 대중도 치아관리 및 치료법을 알아 일상생활에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제 1권 질병목록과 임상증례를 분석해보자. ‘103가지 구강질환의 분류’는 크게 내적 및 외적 원인으로 나눠 정리했다. 내적인 것은 전신성과 체액성, 외적인 것은 열냉작용과 기계적인 것이다. 치의학 기초와 임상과목 분류도 다음과 같이 현대와 유사하다. 

 

(1) 치의학 기초와 예방
구강해부에서는 유치의 치근이 있음을 규명하는 등 세밀한 관찰에 근거하였다. 
유치 맹출시 통증과 예후, 치료는 히포크라테스의 체액설에 머문 한계가 있다. 부은 치은을 십자로 절개한 것은 근대적이다.
삼차신경통과 연관통, 근육경직, 근막성 동통에 대해 현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치아우식의 원인이 설탕과 점성식품이다.
청동을 금박으로 도금하는 거울제작공, 배관공, 광부의 수은으로 인한 직업병을 인지했다.
양치는 거친 칫솔보다 해면에 적절한 분말의 치약과 가글액을 사용하도록 했다.
병사의 송곳니를 빼 중위에게 타가치아를 이식하면서 감염이나 윤리적인 문제를 고려하지는 못했다.
치아재식을 한 후 생리적 압력을 가하면 치주인대부착이 더 잘 된다고 보았다.
영구치나 과잉치의 치배가 뒤늦게 붕출한 것을 재생으로 보는 오류가 있다.

 

(2) 보존학
치아우식의 원인을 고대의 치아벌레가 아니라 체액의 불균형이라 생각하였다.
안드리(Andry, 파리 의과대학장, 기생충학의 시조)나 리비에르(몽펠리에 내과의사)와 달리 포샤르는 현미경을 통해 충치벌레는 발견하지 못했다.
법랑질 형성부전증(enamel hypoplaisa)을 법랑질 표면의 부식으로 파악하고, 유백색상아질, 과 상아질 형성부전증의 원인을 구루병(rickets)으로 파악한 오류가 있다.  
충치는 송곳모양의 기구로 제거한 후 납이나 주석, 금으로 충전할 것을 권장했다.
통증이 있는 치아에 구멍을 뚫고 줄(file)로 와동을 확대한 뒤 정향유(cloves oil)나 계피로 조절해보고, 안 되면 소작하거나 근관 청소를 했다. 근관충전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동요치는 금선에 쐐기를 박아 고정하는 시술을 했다.

 

(3) 보철학
합정 치관(dowel crown)을 사용했고, 치아가 결손된 곳에 다른 사람의 치아, 해마의 송곳니, 코끼리의 상아를 조각해 실로 묶거나 금, 은 부목에 못을 박아 로마시대 이후 첫 고정성 브릿지 제작하였다.
하악 의치에 생선뼈로 만든 용수철을 달아 상악 의치를 고정시키기도 했는데, 인공치 첨두(cusp)나 수직고경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최초로 무기물질을 인공치아로 사용하고 광택을 내서 기존치아와 조화롭게 만들었다.
파레처럼 금속전색자를 스펀지로 고정시키지 않고, 시계공이 수공업품으로 제작한 두 날개금속판으로 발전시킨 구개전색자(obturator)를 만들었다.  ?

 

(4) 외과학
13. 뤼시엥 골드만, 계몽주의 철학, 기린문화사, 1977
솜뭉치덮개(dressing)의 나쁜 영향을 관찰해 가급적 덮개 사용을 자제하였다.
충치가 원인인 낭종(cyst)은 발치 후 악골까지 절개해서 4일간 열어놓고, 25일간 소독했다. 종양 제거 부위에는 파레처럼 장미꿀과 계란 노른자, 살균액을 거즈에 묻혀 대 주었다.

 

(5) 치주학
잇몸질환의 원인은 전신적 원인과 국소적 원인이 있으며, 치석은 치은팽창의 원인이다.
최초로 변연성치주염(marginal periodontitis)과 치주농루증(alveolar fistular)에 관해 해부학적 병인과 치료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과잉치은과 치은종(epulis)은 절제하고, 치은농양(parulis)은 깊숙한 곳을 초기에 절개했다. 심한 경우 발치사나 돌팔이에게 맡기지 말고 내과나 외과의사에게 의논할 것을 권고하였다.

 

(6) 교정학
치아를 펠리컨으로 제자리로 당겨 금선을 명주실로 조여 고정시키는 즉석치열교정방법을 사용하였다. 나이가 어릴수록 성인보다 배열을 바로 잡기 쉽다는 것을 인지했다.

<치과의사, 치아개론 제2권>에서는 치의학 전문 분야별로 기구를 사용해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포샤르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임상 치료 기구는 해부학적 지식과 임상경험에 따라 직접 개량하거나 발명해서 사용했다. 귀금속공예가, 시계수리공, 이발사에게 직접 필요한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18세기 초반 매뉴팩처 수공업 기술을 전문적인 의료기구 개발에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그 결과 다른 외과의사들이 사용하는 기구나 손기술보다 더 구강구조에 적합하고 정교하며, 기계적 정밀성까지 갖춘 독립적인 치과치료기구와 술식들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가장 괄목할 점은 대다수의 발치사들은 환자를 바닥에 앉게 했으나, 포샤르는 ‘머리받침과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에 앉히고, 환자의 체위에 따라 다른 위치에서 시술하도록’ 했다. 그것이 환자의 입안을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포샤르가 발명하고 소개한 진료기구와 진료의자의 기본 형태는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된 현대까지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이상으로 보아 <치과의사>는 임상분과에 있어서는 원숙한 경험과 세밀한 관찰에 근거해 합리적이고도 정확한 추론과 유용한 결론에 도달한 부분이 상당하다. 하지만 내과분야에 있어서는 히포크라테스의 체액설에 근거해 병인과 치료법을 설명하는 중세적인 의술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18세기 프랑스 내과학이 지니고 있던 한계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해부학과 일부 생리학적 지식과 초보적인 현미경 검사를 제외하고는 방사선촬영이나 생이화학적 보조검사가 불가능했던 시대였다. 따라서 임상적인 경험과학으로서의 치의학을 체계화하고 진료기구와 술식을 진보시켰으나, 현대 병리학이나 유전학, 영상의학, 생이화학적 발전에 걸맞은 과학적 추론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판단된다. 
 
2) 치과의사의 전문가주의
포샤르가 주창한 치과의사는 유럽에서 형성된 구강의사(somatologist)로서 외과 분야를 주 전공으로 하는 <치과의사, Le Chirurgien Dentiste>이다. 법적으로는 프랑스 왕립 외과의사의 감독 아래 시험을 통과해 시술을 허용 받는 치과숙련가(dental expert)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강분야에만 평생 헌신하며 치의학 지식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전문직업정신을 발휘할 자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직업집단을 상정한 명칭이다. <치과의사>에 표출된 전문가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더 이상 구강병 예방과 치료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하는 외과의사나 장인들에게 치과의료 업무를 맡기지 않겠다는 자율성을 표출하고 있다.
18세기 말까지 프랑스 인구의 2%만이 귀족과 성직자였고, 80%이상이 가난한 농민이었다. 따라서 인구의 대부분은 치통이 심할 때 발치사(toothdrawer)나 이발사, 돌팔이 의사에게 가서 이를 빼거나, 약장수를 찾아갔다. 부농이나 상인, 도시 중산층들이 외과의사나 치과숙련가에게 가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외과의사가 구강분야를 중요히 여기고 세심하게 치료하는 경우가 적어 오진도 많고 발전이 더뎠다. 포샤르는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외과학의 다른 분야보다 덜 유용하거나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는데, 외과의사들에 의해 덜 중요한 직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들의 오류와 기만을 공중에 알려 바로잡는 것이 전문직의 명예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중요하다’고 표명하였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외과의사보다는 발치사와의 영역 구분을 더욱 명확히 하도록 했다. 발치사들의 경우 자신의 수준을 뛰어넘는 진료로, 환자들을 위험과 고통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둘째, 치과의사가 주도하는 정규 교육과정과 시험제도의 개선, 평생교육과정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포샤르는 ‘치의학 분야만 전문으로 연구하고 숙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치과의사가 시험위원에 포함된다면 응시자들이 오랫동안 임상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에 대해 그 해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으나, 채택되지 못한다. 포샤르는 여러 견습생이 자신의 교육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고, 처남 뒤슈맹(Duchemin)을 견습생으로 가르쳐서 동업하다가 자신이 죽을 때 치과를 물려주기도 하였다. <치과의사>에는 경험이 부족한 치과의사나 견습생들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서술이 많다. 특히 돌팔이 치과의사가 치아를 상악동에 밀어 넣고, 환자에게 삼켰다고 거짓말 한 것이 파리의 내과 및 외과의사들의 협진을 통해 밝혀진 사례를 사기꾼과 같은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포샤르는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칭송받을 일이다. 무엇이든지 충분히 배우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마주치게 되었을 때 신중하고 서두르지 않는 자세로 세심한 관찰과 주의를 기울여 새로운 수술법을 고안하라’고 제안하였다. 평생 치과견습생을 교육할 책을 썼던 포샤르의 삶은 19세기 미국에서 치과대학을 설립하고 국가면허시험제도를 마련하고, 윤리강령을 마련하는데 견고한 기반이 되었다.
셋째, 영리보다는 윤리를 우선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치과의사이다. 당시 떠돌이 발치사는 치석 제거와 미백을 명목으로 강산을 조제액을 팔아 잇몸을 상하게 했다. 치통에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도 많았다. 특허법의 발달과 신문광고로 ‘전매처방’이라는 약광고도 성행했다. ‘말과 십자가 징표와 접촉과 부적 등에 의한 치료를 장담’하는 사기꾼도 많았다. 포샤르는 ‘교회도 이러한 행위를 미신이나 사악한 속임수라고 금지한다’며 기도나 기적을 약속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계몽주의자적인 면모를 나타냈다. 주석이나 납으로 충전한 위에 색소나 금을 얇게 입혀 눈속임하는 동료 치과의사들의 속임수도 대중에게 공개했다. 같은 시기에 외과의사 위대한 토머스(Le Grand Thomas 1729~1757)는 화려한 치장을 하고 파리의 퐁 네프(Pont Neuf)에서 무료로 즉석공연을 하면서 이를 매우 빠르게 뽑는 시연을 해 유명세를 얻고 돈을 벌었다. 돌팔이가 증가하는 것은 구강분야 뿐 전체적인 추세였다. 이러한 돌팔이에 대한 규제는 정규 의사들의 직업적 규범과 결속력에 따라 결정되었다9). 포샤르는 돌팔이와 사기꾼, 미신, 얄팍한 상술을 견제하고자 한 치과의사였다.
넷째, 전문가주의의 핵심은 전문지식과 기술, 윤리의식을 공유하고 객관적으로 만들어 사회에 유통되도록 하는 것이다. 포샤르가 ‘개인적 이익에는 손해이나 자신의 정확한 치료법을 모두 공개한 행동’은 치과계 뿐 아니라 기존 의료계의 관행을 깨는 개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치과의사 집단이 근대의 전문직업인으로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산업 사회로 옮겨가고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 교환은 구매자와 판매자의 개인적 성격에 의존하기 보다는 상품의 표준화된 가치교환에 의존하게 된다. 치과의료의 경우에도 치과의사와 환자 개개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다는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느냐에 따라 상품교환이 이루어진다. 치과의사 개개인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때 일반 대중은 신뢰를 갖고 치과의사를 찾음으로써 치과의료 산업이 발달할 수 있다.

포샤르의 지식 공개는 치과의사 뿐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지적 생산자들의 발전에 영감을 주었다. 프랑스의 치과의사들이 점차 지식을 공짜로 교환하게 하였다. 이러한 실제 사례는  <치과의사> 증보판에 기술되었거나, 포샤르와 협동적으로 소통했던 치과의사들의 행적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르클루즈(Louis Lecluse, ~1789)는 볼테르와 함께 희극배우로도 활동했고(1737~1747) 구강구조를 골, 근육, 맥관, 신경으로 분류한 <구강해부학>을 발간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제 3대구치 탈구기구를 개발하였다. <치과외과학의 진료>에서 유치에 치근이 없다고 한 마르땡(Martin)을 반박하고, ‘유치 치근 내부 체액이 자연적으로 방출되어 치근이 용해된다’고 추정한 뷔농과 포샤르의 이론을 공격하였다. 1772년 파리의 극장을 구입해 가난해진 채 프랑스 혁명 도중에 사망했다.
뷔농(Bunon, 1706~1748)은 <임신한 여성의 치아 질환에 대한 아주 위험한 편견에 관한 개론>(1741)에서 임신여성의 치과치료가 가능하며 눈 이빨(eye teeth, 상악 송곳니)을 빼면 시각에 문제가 생긴다는 잘못된 개념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했다. 이 연구가 ‘미신과의 결별’이라는데 포샤르도 동의함으로써 계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포샤르는 <치과의사>에서 영구치 부식이 홍역, 천연두, 악성열병 때문일 수 있다는 외과의사 장 루이 페티(Jean Louis Petit)의 연구를 인용했다. 이 내용에 고무 받은 뷔농은 구루병, 괴혈병, 홍역, 천연두, 기타 질병으로 죽은 어린 아이들의 미맹출치에 부식이 있다는 것을 사체 해부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이 실험은 <왕립외과아카데미가 보는 앞에서 살페트리에르와 생꼼 병원에서의 경험과 실증 1746>이라는 증보판으로 편찬되었다.
한편 루이15세의 왕실치과의사였던 부르데(Bourdet)는 <치과전서>(1757)에서 하악전돌과 총생(crowding)해소를 위해 유구치 연속발치술을 시행한 것과 제1소구치를 발치하고 제2소구치와 제1대구치에 묶은 실로 전치부를 원심방향으로 옮긴 사례를 발표하였다. Key를 개발하고, 최초로 금상의치(Denture with metal base)를 개발하고 의치 상을 치조돌기와 치은에 일치시키고 치은색으로 착색했다. 치은절제술(gingivectomy)도 개발하였다.
박애주의 외과의사에서 치과의사로 전업한 주르뎅(Anslme Jourdain)은 상악동 질환을 염증, 낭종, 종양성 변화로 분류하였다. <구강의 질병과 외과수술에 관한 논문 (1761년 상악골, 1765년 하악골)>을 간행하였고, 독일어(1784)와 영어 볼티모어(1849), 필라델피아 (1851)로 번역되었다.
포사르도 사용한 적이 있는 광물성인공치아(Mineral Teeth)는 두샤투(Alexis Duchateau)가 착상해서 1776년 프랑스 왕립외과학술원에 보고하였다. 이어 파리의 치과의사 새만(Dubois de Chemant)이 <무변화 무취의 의치, 곧 새로운 인공치아의 특징(1788)>을 간행하여 루이 16세로부터 특허권을 받게 되었다. 제작자 사이에 분쟁이 있었으나 법원은 새만(Dubois de Chemant)의 손을 들어주어 19세기에 도재치아(porcelain teeth)가 나올 때 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포샤르의 추종자들은 포샤르의 <치과의사>를 기반으로 하거나, 반박하는 연구와 실험, 임상기구와 재료개발에 성공하였다. 이들은 각자 1권 이상의 치의학 서적을 발간하였고, 프랑스에서만 <치과의사>라는 제목으로 10여종의 책이 발간되었다. <치과의사>제 3판은 포샤르가 작고한지 25년 뒤인 1786에 포샤르의 후예들에 의해 발간되었다. 프랑스혁명 발발로 유실되었지만, 200년이 지나 각국 치과의사단체에서는 그의 ‘전문가주의’를 기리는 행사와 활동, 번역작업을 지속하고 있다10).
 
마지막으로 포샤르에 의하면 <치과의사>는 ‘공익을 위해 헌신하며 공공에 가장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지식을 바치는 직업인’이다. 포샤르는 증보판 서문에 ‘고통과 밤샘을 거쳐 얻은 열매를 모두 이처럼 공개하는 것은 치과의사라는 전문 직종을 수행하려는 이들에게 쓸모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치아를 건강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라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승인서(1728)를 쓴 저명한 의사들도 포샤르처럼 의학 지식을 공익을 위해 도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피력하고 있다. 당대 지도급 의사들이 지녔던 의학적 계몽주의가 <백과사전파>(1751~1772)보다 시기적으로 앞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포샤르의 전문가주의가 계몽주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치과의사>와 <백과전서>의 출판 의도와 시기, 현재 프랑스 국립면허기구의 기원과 치과의사 윤리강령의 일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3) 포샤르의 전문가주의와 계몽주의
포샤르의 <치과의사>에 나타난 전문가주의와 <백과전서>에 나타난 계몽주의가 지니는 공통점은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식에 대한 개념과 지식의 획득 과정에 대한 정의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백과전서>에서 지식은 ‘자연에 대한 체계적 해석과 그것의 기술적 응용’이고, <치과의사>에서도 치의학문을 ‘치의학 이론과 임상 실제’의 범주에서 다루고 있다. 계몽주의에서 ‘개인은 자신의 자율적이고 비판적 이성으로 지식을 획득’한다. 포샤르는 치의학이 외과학 분야를 뛰어넘고 있음에도 그 분야를 책임질 전문직업인이 없어 대중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자율적인 치과의사였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교육이념이었던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와 자율적인 학습(self-directed learning)은 현대 치의학 교육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둘째, 둘 다 기존의 지식을 백과사전식으로 집대성하여 대중과 미래 세대에 유용하게 활용되도록 하였다. <백과전서>파들은 부르조아 계층의 지식 공유를 통해 산업기술을 발전시키고 불합리한 전제군주제도를 변화시키는 시민의식이 향상되기를 희망했다. 포샤르는 치과의사들과 대중에게 자신의 모든 치의학 지식과 비법을 공개해 치과의사들은 올바른 치의학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대중들도 잘못된 미신이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계몽하고 있다.
셋째, 계몽주의가 ‘지식의 무한한 진보와 보편적 교육이 잘못을 줄이고 인류를 해방시킬 것’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포샤르도 ‘보편적 교육을 위해 오류를 드러내고, 유용한 새로운 연구 보고가 많이 추가되’길 희망하고 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위생이나 모자보건, 정신병에 관한 인식 개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이 파리에서 정신병 환자 요양소의 개혁을 제창하기 시작한 후로 전국에 전문 병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외과학을 비롯해 치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신과 등의 근대 의학이 발달하게 되자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절대권력 뿐 아니라 질병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회가 도래하리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프랑스혁명 후 꽁방시옹(convention)의 결정에 의해 모든 의과대학과 연구소 및 학회 등이 폐지되고, 누구나 자유롭게 의사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기도 했다. 루소가 아동위생을 강조한 것처럼, 프랑스 국민회의(French National Assembly)는 모자보호령(1893)을 내렸다. 하지만 곧 국민회의는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연합군과 전쟁으로 맞서야 했다. 프랑스 군대에 의사가 부족하게 되자, 푸르크로와(Fourcroy)의 보고서(1794)에 따라 새로운 의과대학인 에꼴 드 상떼(Ecole de Sante, 국립위생학교)를 개원하였다. 에꼴드 상떼에서는 외과, 내과, 희귀병 및 난치병 환자를 위한 세 종류의 병원이 운영되었다. 모든 새로운 전문과목이 표방되었고, 모두 평등하게 대우받았다. 이렇게 하여 에꼴드 상떼 의학교는 19세기 유럽의 병원의학을 주도하게 된다. 파리 국립위생학교의 학생 수는 처음에는 600명이었으나, 수년 후에는 1500명
이 되었다11). 이들은 모두 1820년 프랑스 국립의학아카데미의 소속이 된다. 혁명 후 혼란 속에서도 전술한 것처럼 의학의 각 전문과는 보다 평등한 위치에서 인간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질적 발전을 거듭하였다.

넷째, 계몽주의는 ‘지식을 획득한 인간은 사명감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포샤르의 전문가주의도 환자의 이익을 우선으로 사회적 공익을 추구할 것을 주창한다. 하지만 포샤르의 전문가주의가 백과사전파의 계몽주의와 함께 간과했던 문제가 있다. 올바른 지식과 가치에 대한 보편적인 교육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가치판단이 분리될 수 있고, 사적이익과 공적이익이 배리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백과전서파의 볼테르는 ‘관용(톨레랑스’ 정신이 개인과 사회에서 실현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루소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일부의 관용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파악했다. 루소는 사유재산제에 기반한 시민사회에는 자기중심적인 사적인간과 보편이익에 봉사하는 공민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루소는 이들 간의 갈등이 정부의 올바른 법 제정과 교육자 밑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칸트는 이 문제를 개인적 양심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기만족과 도덕성 사이의 갈등’으로 보아 개인 양심의 자율성에 맡겼다.
루시엥 골드만은 이 문제를 계몽주의가 이상으로 삼는 ‘자유와 평등 사이의 모순’으로 보았다. 자유 민주주의의 무한 경쟁 속 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나 전체주의 역시 표방하는 이념과 다르게 자유와 평등, 관용에 아주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롤즈는 자유와 평등 중 어떤 한 가지를 강조한 행위의 과정과 결과가 비윤리적이거나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때 ‘사회 정의나 관용’의 법 정신에 의해 재조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12). 골드만은 역시 ‘어떤 사회에서건 경제가 어려울 때 사적 인간의 이익추구가 공민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현실적으로 분석해 그 해결방안을 마련해야 한다’13)고 했다.


Ⅲ. 결론
이제까지 <치과의사, 치의학개론>에 기존의 치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자신의 비법을 공개한 피에르 포샤르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았다. 18세기 초 프랑스의 중산계층의 성장과 외과학의 발달 속에 포샤르는 치의학문을 독립시켰고, 근대적인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치과의사를 탄생시켰다. 경험론적 합리론과 휴머니즘에 입각한 계몽주의는 지식의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전문가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질의 치의학문과 기술의 공유와 교육, 정직하고 충실한 진료를 통해 공익에 기여하고자 하는 포샤르의 전문가주의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 치과의사들의 규범이 되고 있다. 3판에 걸친 <치과의사, 치의학개론>(1728, 1746, 1786)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협동 작업이었던 <백과사전>(1751~1772) 보다 긴 시간에 걸쳐 출판되면서, 치과의사들에게 국한된 전문가주의가 아닌 사회진보와 공익실현에 기여했던 근대적 시대정신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치과 의료계에는 정부나 의료보험공단, 환자 개개인 뿐 아니라 치과의사 간 소통의 필요성도 증가하고 있다.  한국처럼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는 프랑스의 경우, 공공단체인 프랑스 국립면허기구(Conseil National De L’Ordre Des Meicins)에서 의사와 의사, 의사와 환자간의 분쟁을 조절하고 있다. 의사와 치과의사의 윤리강령도 공중보건법 내에 존치시키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의료산업화나 영리 목적으로 전문가주의가 훼손되는 것을 막아 국민 건강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조절되고 있다고 한다.  전문가주의는 치과의사 개인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치과의사 집단이 지켜야 할 핵심가치에 대한 행동 규범이다. 치과의사간의 의사소통과 의사결정이 원활해야 전문직의 자율규제와 시대변화에 걸맞은 전문가주의의 발달도 가능해진다. ‘사익’이 아닌 ‘공익’에 기여하는 ‘전문가주의’를 분별해 낼 합리적인 문제해결의 경험과 관용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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