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 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대한치과의사협회지

협회지 목록

제53권 11호2015.11

미국선교치과의사 쉐플리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 작성자이주연, 권호근, 박형우

투고일:2015. 9. 15          심사일: 2015. 10. 13         게재확정일:2015. 10. 22

 

 

미국선교치과의사 쉐플리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세브란스치과의원1), 연세대학교치과대학2), 연세대학교의과대학3)
이 주 연1), 권 호 근2), 박 형 우3)

 

 

ABSTRACT


The historical implications of American missionary dentist W.J. Scheifley and the first Korean Dental Department established in the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Severance Dental Clinic1),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Dentistry2),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3) 
Jue Yeon Lee1), Kwon Ho Keun2), Hyoung Woo Park3)

 

This article discusses accomplishments and historical implications of American missionary dentist W.J. Scheifley and the first Korean dental department, which was established in 1915 in Korea. W.J. Scheifley, with Christian service mind and mission as a dentist, applied to American Protestantic missionary dentist overseas .
The dental department in the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introduced the scientistic dental education of America, facilitated research on the dental condition of the Korean people, and ran independent dental clinic. W.J. Schiefley criticised the profit-seeking attitude of Japanese dentists and denturist(=?PCHISA? in Korean pronunciation) and emphasized on the significance of Oral Health. He did all kind of dental treatments with advanced equipments like X-ray machine, and managed the collective oral health care for missionaries overseas.
He trained medical students and assistants of the dentists with the goal of producing Korean dentists, but he failed due to the Dentist law introduced by Japanese colonial administration that interfered with producing Korean dentists. 
However, O.R. Avison? proposal of the establishment of dental schools stimulated the establishment of Kyungsung dental school, which provided the basis for the Dental department in the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becoming special training institution for Korean Dentists.

Key words : W. J. Scheifley, Severance College Dental Department, dental education

 

Corresponding Author
Jue Yeon Lee
152-871, Severance dental clinic, 722-8, Guro 2-dong, Guro-gu, Seoul, Korea
Tel :  + 82-2-854-0028, C.P : +82-10-9148-0517, FAX : +82-2-854-0027, E-Mail : mar123a@hanmail.net

 

본 연구는 2011년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Ⅰ. 서론


올해는 우리나라 치과계가 서양 근대치의학 교육의 문을 연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5년 11월 1일 미국의 선교치과의사 쉐플리(William Jeremiah Scheifley)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한국 최초로 치과학 교실을 설립하였기 때문이다. 쉐플리 이전의 우리나라 근대치의학 교육에 관한 기록은 세 가지 정도가 전해진다. 첫 번째 기록은 제중원에서 1884년부터 선교의사들이 구강질환을 치료하고, 1901년 의학생들에게 발치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보고서이다. 두 번째 기록은 미국치과의사 한 대위(David Edward Hahn)가 자신의 치과에 치의학교를 설립했다가 제중원에 새 건물이 지어지면 세브란스병원의학교와 연합할 계획임을 알리고 축하하는 1909년 10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와 논설이다. 한대위의 치의학교 설립 계획은 일제통감부에 의해 ‘보류’ 형식으로 무산되었다. 세 번째 기록은 민제병원 치과부에 근무했던 입치사 박교상이 1913년 5월부터 8-9개월간 ‘치과의학생 모집하여 치과강습소를 연다’고 냈던 광고이다. 입치영업에 필요한 치과기공술을 가르쳤을 것으로 추측되나 교육내용이나 배출된 학생 수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위 세 가지 기록물들은 엄밀하게는 근대 치의학의 교육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18세기에 피에르 포샤르는 구강악안면 분야의 각종 질환의 원인을 추론하여 분류하고, 임상술식을 정리하여 집대성함으로써 근대 치의학문을 외과학에서 독립시켰다. 피에르 포샤르의 기준에 따르면, 제중원에서 의사들이 외과학의 일부로 발치술을 가르친 것이나, 입치영업자가 전수한 입치술은 치의학문의 특정 분야에 대한 도제식 기술훈련이지 근대 치의학문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은 아니었다. 한 대위의 학교설립안만이 치과의사가 구강악안면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한다는 주체와 내용 측면에서 근대 치의학 교육 요건은 갖췄다. 하지만 통감부의 식민지 통치정책과 맞지 않아 어떠한 물적·제도적 토대도 마련하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교장 에비슨(O. R. Avison)은 장차 치의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치과학 교실을 이끌어갈 선교치과의사를 구했다. 1915년 쉐플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 초대교수로 임명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치의학문의 연구와 교육, 외과에서 독립된 치과진료를 총괄하는 치과학 교실이 탄생하였다.
본고의 목적은 우리나라 근대치의학교육의 도입에 있어서 쉐플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을 개설한 것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그 실체를 파악하고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쉐플리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가 되는 개인과 학교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대개 학교사의 경우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되고 부정적인 면은 언급되지 않는다. 인물사도 후대에 남은 업적에 따라 개인적 성향이 미화되거나 호도되기가 쉽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현장답사와 문헌발굴조사를 강화하였다. 선교치과의사로 내한하기까지의 쉐플리의 이력과 삶은 미국연방인구주택총조사서, 인명부, 필라델피아치과대학 학적부, 치과의료선교사지원서, 추천서, 각종 편지, 여권신청서, 승객명단 등을 통해 세밀하게 조사하여 재구성하였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의 활동은 북장로교선교보고서, 각종 편지와 선교본부결정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학적부, 가이스보고서(Gies Report)등을 통해 실증적인 세밀함과 객관성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쉐플리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에 대한 객관적인 실증만으로 역사적 의의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쉐플리의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해외선교를 지원하게 된 동기와 치과의사로서의 역량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 개설의 의미에 대해서는 초대과장 쉐플리의 활동이 한국의 근대치의학 교육 도입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 초기 미국인 선교치과의사가 시도한 치의학 교육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다음 세 가지 요소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이해가 필요하다. 첫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북미 치과의사들의 아시아 진출이 일본, 중국, 우리나라의 치과의료에 끼친 영향이다. 일본의 근대 치과의료제도 형성에 끼친 영향과 선교치과의사의 역할에 주목할 것이다. 둘째, 미국의 치의학 교육의 변화와 1910년대 미국 치의학의 발전 정도이다. 당시 의치일원론과 의치이원론에 대한 인식과 적용은 어느 국가나 가변적이었음을 전제로 기술할 것이다. 셋째, 일제강점 초기 총독부의 치과의료정책과 세브란스연합의학교장 에비슨과 쉐플리의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 및 치의학교 설립 노력과의 역학관계이다.
이제 쉐플리의 성장과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에서의 활동 궤적을 따라 일제 강점기 한국 근대치의학 교육의 씨를 뿌리고, 성장하게 된 동력과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Ⅱ. 본론


1. 쉐플리의 성장과정과 선교치과의사 지원 동기

 

1) 쉐플리의 가계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William Jeremiah Scheifley)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정착한 독일계 미국인의 후손이다. 증조 할아버지 제이콥 쉐플리(Jacob Scheifley, 1819-1864)는 독일의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에서 태어났다. 제이콥은 루터교회 신자로 공장 직공으로 일하며 같은 지역 출신인 마리아 시겔(Maria Siegel)과 결혼했다. 1848년 제이콥 부부는 존과 메리라는 두 자녀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존(John Scheifle, 1836-1909)이 열두 살 때였다. 미국이 처음으로 이주민을 받아들여, 유럽에서는 주로 아일랜드와 독일인들이 대거 이주했다. 1848년에 증기선을 타고 뉴욕항에 도착한 독일인들의 80%는 주로 북동부의 공업도시나 농업지대로 이주했다. 쉐플리 일가는 펜실베니아 주의 레딩에 정착해 노동자로 일했다. 대륙횡단철도가 피츠버그까지 연결되면서 레딩은 필라델피아 근처의 물류조달지가 되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섬유, 가죽, 철강, 유리, 식품가공업 등의 산업이 발전하였다. 그리고 1780년 노예해방법을 통과시켰을 만큼 정치적으로도 앞선 도시였다. 제이콥 쉐플리는 레딩의 철강회사에서 근무했다. 존 쉐플리는 레딩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21세가 되던 해 동갑의 레딩 아가씨 캐서린 봅스트(Catharine Bobst, 1836-1886)와 결혼했다. 존은 브럼바크 모직공장에서 모자를 만드는 직공으로, 캐서린 봅스트는 경리로 일했다. 제이콥과 존 부자는 모두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자였다. 남북전쟁(1861-1865)이 일어나자 43세의 제이콥과 26세의 존 쉐플리 모두 참전했다. 제이콥은 버지니아 주 피터스버그 근처의 전투에서 왼쪽 다리를 잃었다. 그는 뉴욕 주로 후송되었으나 1864년 웨스트체스터에 있는 데이비드 아일랜드의 군대병원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존 쉐플리도 “1862년 12월 13일 벌어진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레딩의 세 중대 42명 중 40명이 전사했다. 존은 맘 속 평화를 느끼며” 살아남았다1). 존은 2남 5녀의 아버지로, 남북전쟁 퇴역군인으로, 공화주의자로, 복음주의 교회 교인으로, 우체국 직원으로 장년기를 보냈다. 덕분에 맏아들 윌리엄 제이콥(William Jacob Scheifley, 1860-1947)은 우체국 직원인 메리 제인 디펜더퍼(Mary Jane Diefenderfer, 1862-1943)와 결혼했다. 윌리엄 제이콥은 모자직공과 담배상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했다. 35세가 되던 해(1895)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연합복음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 부부 사이에서 1892년에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가 태어났다. 두 누나 모두 11세에 결혼했고, 매형 한명도 연합복음교회 목사가 되었다.
연합복음주의 교회는 1803년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야콥 올브라이트가 창시한 복음주의 교파와 감리교 신자들이 합쳐져 1894년에 발족된 교회이다. 즉 쉐플리의 가계는 종교개혁 1세대인 독일 루터파부터 연합복음주의까지,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으로 소통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독일계 미국이민 1세대로 공화주의적 애국주의자들이었으며, 종교와 노동으로 근면하고 화목한 생활을 유지하며 살았다.

 

2) 쉐플리의 성장과정

쉐플리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 등으로 보낸 편지와 의료선교사 지원서, 추천서에는 쉐플리가 우리나라에 선교치과의사로 오기 전까지의 성장과정이 잘 나타나있다.

 

(1) 기독교 신앙 속에 해외선교지원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는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고 기도를 통해 감화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영적인 교감을 얻었는지 또박또박 이유를 이야기하곤 했다. 열 살 때 찬송가를 부르며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는 행복을 느꼈다. 열세 살 때부터 교회 사역자로 일하면서 매우 즐겁고 약간은 놀라운 경험들을 했다. 성가단원으로 성가를 부를 때 쉐플리는 낙천적이고 활기차 보였다. 다른 대원들과는 친밀하게 협동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상당히 매력적이고 훌륭한 테너 가수로서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련되고 매너 있는 지휘자가 되었다. 지적인 활력도 풍부해 점차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지도자로 성장해나갔다. 여러 해에 걸쳐 주일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강의를 준비했다. 학생들은 점차 쉐플리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그러한 성과에 힘입어 교사를 훈련시키는 교사가 되었다.
필라델피아 중앙고등학교(1906-1910) 시절부터 ‘면려청년회(Christian Endeavor Society)’에 참석했다. 1881년 미국 포틀랜드시 클라크(F. E. Clark)목사가 시작한 기독면려청년회는 초교파적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대 미국의 사회개량운동으로 성경 말씀에 따라 개인의 생활을 절제하는 금주, 금연, 도덕주의 등의 절제운동을 벌렸다. 이러한 운동은 각 교파별 ‘금주위원회’, ‘절제회’, ‘사회사업위원회’ ‘풍속개량회’ 등으로 이어졌다. 쉐플리의 의료선교사 지원서에는 ‘금주위원회 의장, 면려청년회의 회장, 면려청년회연합회의 자문위원’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목할 내용은 쉐플리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07년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학생자원운동 신청서를 냈었다는 점이다. 쉐플리가 학생자원활동에서 받은 영향은 ‘쉐플리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로 보낸 1914년 9월 16일자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교 사역에 대한 나의 소망, 그리고 이를 이루려는 소망의 실제 예는 학생자원운동 사무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때 이후 해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혹은 파송되는 남녀들과 접촉해 왔기 때문에 해외 선교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졌습니다. 나는 소명을 거부할 온당한 명분이 없음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절박하게 내가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해외선교 열망은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에 재학 중(1910-1913.6.5)일 때에도 지속되었다. 치과대학 3학년 졸업반 때 ‘중국 사람들이 치과의사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합복음교회 선교치과의사를 자원했다. 하지만 연합복음교회는 아직 치과의사를 선교사로 임명할 재원이 없어 쉐플리에게 중국 후난지역에 일반선교사로 가도록 권했다. 쉐플리는 치과대학을 졸업하기 전이었고, 향후 진로로 치과에 더해 의학 교육을 받을까 고민하고 있었기에” 가지 못했다.

 

(2) 필라델피아 치과대학 졸업과 세브란스 병원장 에비슨과의 만남
1863년 개교한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은 1907년 12월 템플대학과 병합하였다. 하지만 쉐플리가 졸업하던 1913년 6월까지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쉐플리는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하였다. 또 임상이나 교육, 연구 측면에서 장래가 가장 유망한 치과의사라는 교수 평을 들었다.
쉐플리는 치과의료선교를 나가지 못하면 장차 교수가 될 생각으로 일단 해리스버그에 개원(1913.12-1915)을 했다. 개원한지 2주 만에 ‘장로회 선교본부가 중국에 파송할 치과의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쉐플리는 장로교 카터에게 편지를 썼다. “현재 나는 약 1,200 달러 상당의 치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교육과 장비 구입으로 약 1,200 달러의 부채가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개업이 성공적이지만, 만일 선교치과의사의 길을 열어주신다면 기꺼이 헌신하겠습니다. (1913년 12월 23일자)” 하지만 장로교 카터는 “중국위원회에서 제출한 92명의 선교사 요청명단에 치과의사가 없고,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치과의사를 찾고 있다. 하지만 치과의사 파송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독지가가 기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한국선교회에 치과의사를 파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쉐플리의 부채와 어린 나이 때문에 유감스럽다.(1913년 12월 24일자)”고 답했다.
쉐플리는 포기하지 않고, 1914년 9월 16일자로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정식 지원서와 편지, 건강진단서를 보냈다. 지원서에서 쉐플리는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종종, 혹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가족과의 이별, 아이들의 불충분한 교육기회를 포함하여 어떤 고난과 희생이 있더라도 맞설 각오로 일생을 해외선교에 종사하겠다고 신청한다’는 문항에 ‘예’라고 동의를 표했다. 편지에는 “치과의사로 크게 도움을 주고 섬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이 언제 어느 때이건 해외선교활동을 나갈 수 있으며, 치과의료선교에 대한 관심과 기금 부족을 해결하고자 보다 자립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치과의사가 되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건강진단서에는 쉐플리의 키는 180cm, 몸무게는 67kg로 갈색 눈과 갈색 머리카락에 안경을 썼다. 6개월 전 장의 식중독으로 치료한 것 이외에는 건강이 양호한 상태이다. 성격은 약간 소심하고 조심성 있는 편이라, 생명보험회사에 약 1000달러의 보험을 들고 있는데, 위험을 분별할 수 있는 환자(prudent risk)로 추천한다. 열대기후나 추위가 이 지원자에게 질병을 일으킬 가능성은 적다. 11년 전에 예방접종을 받은 것이 전부이므로, 해외선교사업에 필요한 천연두와 장티푸스 등의 예방접종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쉐플리의 의료선교사 지원서를 장로교 선교본부는 1914년 9월 28일자로 철회하였다. 총무비서 4인이 투표한 결과 3인이 쉐플리의 의료선교사 임명을 찬성했다. 하지만 어리고, 부채가 있으며, 일반사역에 서툴고, 자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 이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쉐플리는 7명의 추천서를 받아 12월 15일까지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제출했다.  쉐플리과 관계된 공개 제한 편지에 답한 추천인 6명은 의사인 리첸마러 박사(Dr. A. B. Lichtenmahrer), 4년간 같이 일한 교회동료 스미스 씨 (Mr. J. B. Smith), 부친친구 쿠퍼 목사(Rev. A. W. Cooper), 필라델피아 치과대학교수이며 4년간 가정주치의였던 베이트먼 박사(Dr. S. E. Bateman), 헤리스버그 교회 주일학교 교사 엘리자베스 덤 양(Miss Elizabeth A. Dum), 매형인 목사가 운영하는 교회의 신도인 냉제세르 씨(Mr. J. J. Nungesser)이다. 연합복음교회 목사 조지 에프 샴(Geo. F. Schaum)은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쉐플리의 기독교적 품성을 보증하는 편지를 보냈다.
추천서에 기재해야 할 항목은 지원자의 성격과 업무습관, 지도력과 성취능력, 기독교적 품성, 해외선교사로서의 자질, 치과의사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 등이다. 이들의 추천서에는 ‘쉐플리의 성격은 견실하면서도 활동적이고 낙천적이면서도 헌신적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고, 관찰력과 친화력이 있어 협조를 잘 하고, 설득력과 지도력이 있다. 업무습관은 철저하고,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훌륭한 성과를 얻으므로 최상이다. 돈의 가치를 알아 검소하고 절약하며, 돈 사용에 있어서 신중하고 조심성 있으며 알뜰하다. 지적으로 똑똑하고 현명하며, 수행능력이 뛰어나고 독창적이다. 열정적이며,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평가되어 있다.
1914년 11월에 쉐플리의 서류가 에비슨에게 전해지면서 쉐플리의 의료선교사 지원서는 12월에 미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의해 다시 심의되기 시작했다. 
1914년 12월 안식년을 맞은 세브란스 병원장 에비슨 부부는 쉐플리의 치과와 약혼녀 루스 래플리(Ruth E. Lafley, 1894.10-)의 가정을 방문했다. 루스 래플리는 20세로 유치원 교사 수련생이었다. 아버지 존 래플리(John Lapley 1864-)는 독일 출신의 신발상인이었고 어머니 매기(Maggie)는 펜실베니아 출신이었다. 래플리는 이 부부 사이에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딸이었다. 중앙고등학교를 졸업(1913.6)하고 프뢰벨 유치원학교(1915.6)를 이수했다. 에비슨이 화이트에게 보낸 1914 년 12월 23일자 편지에는 쉐플리와 래플리에 대한 에비슨의 소감이 상세히 적혀있다.

“우리는 그의 약혼녀 집을 방문해 그녀의 부모를 만났습니다. 이 면담의 결과 우리는 쉐플리 박사가 우리 학교의 직책에 충분히 충족하고, 선교의 측면에서 우리의 힘을 바람직하게 보강해 줄 것이며, 그리고 약혼녀인 래플리 양 역시 사역을 위해 매우 유망하고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쉐플리 치과는 장비가 잘 갖춰져 있고 전문적인 관점에서도 면밀하게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쉐플리는 치과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해외 선교지에 나가지 않게 되면 자신의 일생을 어떤 치과대학에서 교육에 종사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면려청년회의 회장이며, 2차 년도에도 회장으로 재선되었습니다. 그는 명석해 보이며,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에 대한 봉사에 굳혀져 있는 것 같습니다.
래플리 양은 우리가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좋으며, 사역을 희망하는 그에게 즉시 합류할 것이고 유치원 교사 과정을 거의 끝낸 상황이어서 한국의 어린이들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들을 이런 일에 임명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쉐플리 박사는 준비가 되면 즉시 임명을 받아 파송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개업일을 정리하고 선교사로서의 실제적인 준비를 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중략)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을 임명을 찬성하지만,  화이트와 선교본부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에비슨과의 면담을 마친 쉐플리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현재 미국에서의 경제적인 전망이 밝지만, 봉사할 수 있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가고 싶습니다. 나는 선교치과의사라는 직책에 적합한 사람이 되고자 하고, 나이에 비해 진정 사려가 깊다는 점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세브란스의학교에 가게 된다면 결혼식을 마치고, 개업을 정리하고, 장로교로 교파를 옮길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에비슨은 “쉐플리의 부채가 실제로 우리가 치과설비를 위해 필요한 것을 구입하기 위해 초래된 것이고, 치과진료장비가 모두 새 것이기 때문에 장비 기금으로 모든 것을 인수할 것입니다. 쉐플리의 월급은 존 세브란스와 알렌 부인이 지원할 것입니다(1914년 12월 30일자 편지)”라는 답변을 보냈다. 1915년 2월 15일자로 쉐플리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교수로, 래플리는 쉐플리와 함께 한국선교회로 임명받았다. 4월 쉐플리는 충수돌기염 수술을 받았다. 쉐플리와 래플리는 함께 예방접종을 받고 여권도 발급 받고, 이른 여름 결혼식을 치렀다. 두 사람은 8월 7일 증기선 톤요 마루(Tonyo Maru)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하여 31일에 도착하였다.

 

3) 북미치과의사들의 아시아 진출과 선교치과의료
19세기 후반 미국인들의 해외진출은 미국의 대외 식민지 팽창주의 정책과도 결합되어 정치, 제도, 제반 산업과 문화부분까지 광범위했다. 이 시기 미국의 치과의사들도 해외진출에 관심이 많았다. 그 이유로는 1870년까지 1,065명에 불과했던 치과대학 졸업자들이 30년 후인 1900년에는 30,500명가량으로 약 30배 증가했기 때문이다. 1880년대부터 치과대학 학위가 있어야 치과의사 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을 정한 주들이 증가했다. 그러자 1800년까지 13개였던 치과대학이 1900년까지 57개로 증가하였다2). 상업적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설 치과대학이 난립하고, 수준 낮은 개업의사가 운영하면서 졸업장을 헐값에 팔기도 했다3).
1894년 일리노이주의 언론인이자 치과의사 렌맘(Herman Lennmalm)은 세계 각국의 치과관련현황에 대한 최신 정보를 총망라하여 출판하였다. 400여 쪽에 세계를 북미, 중남미,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순으로 인구, 면적, 수도, 치과관련정보를 담았다4). 아시아 진출은 일본, 중국, 조선 순이었다. 1860년대에 일본 요코하마, 고베 등지에 개업한 미국인 치과의사들에게 도제식으로 배운 小幡英之助의 청원으로 1883년 치과의술 개업시험이 의술개업시험에서 분리되었다. 1890년에는 2년제 다까야마 치과의학원(高山齒科醫學院, 현 동경치과대학)이 생겼다. 즉 일본의 근대적 치과의료체계에 해당하는 치과의사 시험, 치과의학교 설립은 미국인 치과의사들에게 민간 차원에서 치과의술을 습득한 일본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1880년대 중국에는 미국인 치과의사 홀(J,W. Hall), 피터슨(D.E. Peterson)등이 저명인사가 되어, 상위 1%에게 진료를 했다. 이들 밑에서 간단한 발치와 충전을 배운 중국인 양아사라는 직종도 생겼다. 하지만 중국의 너무나 넓어 미국인 치과의사들의 영향력이 미미했다.
우리나라에는 1897년부터 미국인 치과의사들이 찾아와 출장진료를 했다. 상해에 있던 로빈슨(Robinson), 일본 고베의 슬레이드(Harold Slade), 요꼬하마에서 온 니이(Daniel B. Nye)등이다. 이들은 서울과 인천에 있는 호텔 등에 머물면서 간단한 출장진료를 했다. 1903년 고종황제의 앞니에 ‘사기질 금죔쇠’로 보철치료를 한 소어스(James Souers)도 일본 고베의 개원의였다. 대한제국기까지 해외시장을 개척하려는 미국인 치과의사들 중 우리나라에 상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한편 19세기 후반 서양인들이 동양에 진출했던 다른 배경은 기독교의 해외선교운동이었다. 쉐플리가 고등학생 때부터 참여했던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은 1886년 피어선(A.T. Pierson)과 무디(Moody)목사의 ‘우리는 선교를 위해 세계 모든 곳으로 가야 한다’는 설교에서 시작되었다. ‘세계선교’에 영적 감화를 받은 미국과 캐나다의 89개 대학교에서 모인 학생들이 학생자원운동단체를 설립했다. 이 운동은 50년간 매일 한 명꼴로 1945년까지 무려 20,500명의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였다. 그 중 30%가 중국으로, 20%가 인도로 파송되었다5). 당시 우리나라에 온 의료선교사들도 대부분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동양에 선교치과의사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적다. 우리나라에 온 한대위와 쉐플리, 부츠, 맥안리스, 레비(James Kellum Levie), 중국 치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캐나다 출신의 린드세이(Ashley  Lindsay)와 하버드 치과대학 출신 치과의사들이 있다. 토론토에 있는 왕립치과대학(Royal College of Dental Surgeons)을 졸업한 린드세이는 1907년 중국에 들어갔다. 린드세이는 중국인들에게 치의학 교육을 하기 위해 하버드 치과대학 출신 치과의사들을 교수진으로 세웠다. 그리고 쉐플리보다 1년 늦은 1916년 청두에 있는 서중국연합대학교(West China Union University)에 치과학교실을 개설하였다. 치과진료실을 1917년에 열었고, 1921년 의학부에서 독립해서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구강학(Stomatology)대학으로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20세기 초반에 우리나라와 중국에 온 선교치과의사들은 몇 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교치과의사들이 한 치의학 교육 및 치과의사 양성 노력은 가장 주목할 만한 핵심적인 공헌이라 평가할 수 있다.

 

2.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1)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탄생

 

(1) 치과학교실의 의의
1915년 11월 1일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 교실과 치과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개설된 치과학 교실이었고, 종합병원급에서는 최초로 독립적으로 운영된 치과진료실이었다. 동양에서 해외선교 운동과 연결된 치과가 생긴 것도 처음이었다. 초대 과장 쉐플리는 ‘구강진료와 교육,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쉐플리는 치과학 교실을 통해 당시 가장 선진적이었던 미국의 치의학문과 진료기술을 소개하고, 세브란스연합의학교 학생들에게 치과학을 강의하였다. 또 치과의사 수련 및 연구를 통해, 치의학의 학문적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비교해 조선총독부의원의 치과는 외과 산하로 부설(1911.3)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위생행정방침에 ‘치과는 외과의 일부’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통감부 경부 및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위생과에 배치되어 일제 초기 위생행정을 총괄했던 시라이시 야스나리(白石保成)는 ‘치과는 의술의 일부로 외과에 속하며 그 범위는 입치, 발치, 이에 수반하는 응급수술과 진통 등이다’라고 천명하였다6). 1916년 초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치과가 독립되고, 부속강습소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때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가 치과 과장 겸 조교수로서 치과학을 강의하였음에도 ‘치과학 교실’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생각된다.
첫째, 1910년대 총독부의 공문서에서 치과는 의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체계가 아니었다. 명치유신 때 독일의학을 국시로 삼아 비록 치의학이 민간 미국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유입이 되었더라도 관에서는 독일의 구강과(Stomatology)나 의치일원론(醫齒一元論)에 입각한 분류를 하는 관행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또 일본의 전통한방에 구중의(口中醫)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조선에 상주하는 치과의사가 총독부 치과의사면허와 의사면허, 입치영업면허 3가지를 받아야 했던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둘째, 미국의 치과의사회의 위상과 역할이 일본의 치과의사회의 것보다 높아 의사와의 법적 분화도 빨랐다. 19세기 말 미국의 모든 주에서 면허제를 법제화하면서 의사와 치과의사는 별개로 분리되었다. 미국치과의사회(ADA) 역시 남북전쟁으로 둘로 갈라져 있다가 1913년에 합쳐져 전문직 단체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의 치과의사회인 대일본치과의회(大日本齒科醫會) 역시 1906년 치과의사법을 제정하여 입치영업자를 치과진료를 불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의사의 치과의술까지 금지하지는 못하였다. 치과의사수에 있어서 미국은 1910년에 39,997명, 1920년에 56,152명으로 40%증가하였는데, 일본 본토는 1910년에 1,125명, 1916년에 3,482명, 1926년에 12,549명으로 15년간 110% 증가하였다.
셋째, 치과학 교실은 치의학문 자체의 연구와 교육의 성격이 강하나, 치과진료부는 단지 진료에 국한된 업무를 수행한다. 치의학문이 모든 구강악안면질환에 대한 원인과 병리, 예방 및 치료방법에 관한 이치를 밝히는 포괄적인 영역이라면, 치과진료는 실제 임상 행위로 표현되는 일부이다. 치의학문에 대한 연구와 교육, 진료를 총괄하는 치과학 교실은 치과의사관련 법과 같은 사회적 요소와 결합되어 치과의사가 재생산될 수 있게 하는 핵심요소이다. 쉐플리는 치과학 교실에 일본인 치과의사나 입치사들의 도제식 훈련과는 차별화된 1910년대 미국의 ‘과학적 치의학’을 한국에 도입하고자 했다. ?

 

(2) 한국인의 구강보건 상태와 미국의 과학적 치의학 교육의 도입7)
11. 佐藤綱藏, 이충호 역, 「에비슨의 종합대학 설립설」, 『조선의육사』, 형설출판사, 1993;53-117.
그렇다면 1910년대 미국의 ‘과학적 치의학교육’이란 어떠한 수준의 내용과 형식을 담고 있는 것인지 미국치의학 교육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19세기 초반 미국의 치의학 교육이 보철을 위한 기공학 위주로 진행되고, 수준 낮은 사설학교들이 급증하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구강외과학과 임상교육이 포함된 3년간의 교과과정이 확립(1899)되었다9). 한 대위와 쉐플리가 졸업한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은 미국 치과대학 중 가장 먼저 구강외과와 마취학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킨 학교였다. 구강외과 강의는 치과의사가 아닌 외과의사와 마취과 의사에 의해 교습되었다. 따라서 한 대위는 자신을 치과외과의(dental surgeon)라 명명하였다. 19세기 말 미국 내 치과대학이 증가하여 도제형식으로 기계적인 보철술을 배우던 치과기술자(dental engineer)들은 40%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세기 초반 미국 내 60여 치과대학의 치의학 교육에는 질적인 내용과 사회적인 형식면에서 전면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먼저 내용적으로 그 동안 보철 중심의 임상적인 치과진료에만 치중하여, 기초 의과학적인 문제를 형식적으로 다루었던 것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1890년 밀러(W.R. Miller)의 화학세균설이 등장하고, 1910년 영국의 내과의사 윌리엄 헌터(William Hunter)가 캐나다 맥길대학 강연에서 구강병소감염설(focal infection theory)를 주장하였다. 미국 치과의료의 잘못된 치과시술과 불량한 보철물들이 수많은 전신질환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구미의 의과대학에서는 치의학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의사들은 치과적 지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치과의사들의 진단과 치료시술을 무시하고 특정 치아나 모든 치아의 발치를 주문하였다. 또 국소감염설에 반대하는 치과의사들에게는 생물학적 기초가 빈약하다며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가지 지속되었다. 그 와중에 구강병소감염설을 상업적으로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치아를 빼도록 지시하는 의사나, 패인리스 파커(Painless Parker)처럼 이를 뺀 자리에 보철을 해 넣어 영리를 극대화하려는 치과의사들도 늘어났다. 이러한 비판과 소동을 겪으면서 구강병이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으며, 치의학 분야에도 기초과학 및 의학교육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또 세균학, 병리학, 방사선의 발달을 치의학 분야에 대폭 활용할 필요도 생겼다.
1910년 플렉스너(Abrahm Flexner)보고서의 영향도 컸다. 1925년까지인 15년간 미국과 캐나다에 있었던 상업적이거나 교과과정과 설비가 기준에 못 미치는 의과대학의 절반가량이 퇴출되는 대대적인 혁신이 이루어졌다. 치의학계도 그 영향을 받아 1909년 미국치과의사회 산하 미국치과교육위원회(Dental Education Council of America)가 조직되었다. 치의학 교육여건의 개선과 과학화를 위해 기초 및 일반의학교육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하버드 치과대학 위시한 치과대학교수들이 카네기재단에 치의학교육에 대해서도 조사해줄 것을 요청하여 가이스(Gies)가 연구를 시작하였다. 1914년 미국치과학교육위원회는 4년간의 정규치과교육과정을 권장하면서 최소 3년을 지정하고, 치과대학생들도 총체적인 의학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많은 사설 치과대학들이 종합대학에 편입해 들어갔으며 의과대학과 더욱 긴밀한 연관을 맺기 시작했다. 쉐플리는 1913년 6월 템플종합대학과 연합한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의 마지막 기수로 졸업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치의학 교육개혁의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쉐플리가 제기한 ‘과학적 치의학’이란 기초과학 및 일반의학교육을 강화해 치과진료의 범위와 질을 높이고 공중구강보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강 및 전신건강에 대해 의사들과 협진할 수 있는 공중보건전문가(oral sanitarian) 또는 구강내과의사(oral physician)로서의 역량을 갖추는 것이 교육 목표였다.
쉐플리는 1916년 한국선교본부잡지에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의학 교육의 목표가 ‘환자의 전신건강과 구강 조직의 건강에 필요하다고 알려진 과학적인 원칙에 입각한 치의학문과 시술에 대한 철저하고 충분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쉐플리가 시도한 ‘과학적 치과학 교육의 정립’은 식민지하 한국에서는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2) 치과학 교실의 치의학 교육과 총독부의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 억제

치과학 교실 개설 당시 선교본부에서는 쉐플리에게 의대생들의 교육과 함께 장차 치과의학교나 치의학 연수기관으로 발전시킬 임무를 부여하였다. 쉐플리는 의대생 교육과 치과의사 교육 각각에 대해 차별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시행해나갔다.
 
(1)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강의
쉐플리의 치과학 강의는 의학교 최고 학년인 4학년생들에게 매주 1시간씩 진행되었다. 강의 내용은 치과병리, 치과질환의 중요성, 발치 등에 대한 개념정리와 실습이었다. 쉐플리는 그 동안 일반의사들이 한 치과진료가 주로 발치나 소독, 구강양치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전문적인 치과치료는 치과의사가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하지만 일반의사들도 치과질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대중교육과 진료에 임할 수 있을 정도를 교육목표로 잡았다. 매주 강의개요를 나누어주고, 임상시범을 보이고 실습을 진행하고, 가끔 복습용 시험을 보았다. 쉐플리는 2년간 한국말을 배웠으나 총독부에서는 일본책과 일본어로 강의하도록 독촉해 차질을 빚었다. 쉐플리는 과중한 업무량과 건강악화 속에서도 1917년 가을부터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1918년 세브란스 이사회 연례회의에서는 ‘의대생 교육을 새로 부임한 일본인 치과의사 미시나 게이키치(三品敬吉)에게 맡기고, 치과학 교실 전체 총괄과 외국 선교사와 가족들을 위한 진료에 중점을 두라’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쉐플리는 ‘교육치과의사로서의 자신의 유용성이 끝났다’고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임무에 충실하게 임했다. 조선총독부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가 한국인들에게 서양식으로 교육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질 않았다. 그래서 사립학교 규칙이나 전문학교 규칙 등을 통해 감독과 규제를 강화하고, 3.1운동 이후에는 세브란스 병원을 경찰의 통제 하에 두는 법령을 발효하였다.

 

(2) 치과조수 수련제도 마련과 총독부의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 억제정책
조선총독부는 1913년 11월 15일 ‘의사규칙’과 ‘치과의사규칙’을 발표하고, 같은 해 12월 25일 ‘입치영업자취체규칙’을 발표했다. ‘의사규칙’에 따라 의학교 교육연한이 4년제로 바뀌자 조선총독의 지정을 받지 못한 학교는 따로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의사면허를 딸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1월 ‘조선의사시험규칙’이 제정되면서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들은 총독부의 지정을 받게 된 1923년까지 의사면허 시험을 치러야 했다. 또 ‘조선치과의사규칙’에 치과의사 자격은 ‘문부성이나 조선총독이 지정한 치과의학교 졸업자나 치과의사시험에 합격한 자, 외국치과의학교를 졸업하거나 외국에서 치과의사면허를 얻은 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913년 이후 8년간 조선 내에는 치과의학교도 없고, 총독부 치과의사시험제도도 생기지 않아 치과의사가 되는 길은 일본의 치과의학교로 유학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입치영업취체규칙’은 일본 본토에서 불법화 된 입치영업자들이 일본인 치과의사들의 의권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입치업을 하도록 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치과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공사립 치과의료기관의 조수나 보조원으로 취업하여 잡무를 보면서 치과학이나 치과기공술을 배우는 일을 5년 이상 한 사람만이 입치영업면허를 딸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선 내 치의학교와 치과의사시험이 없는 상황에서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을 장차 치의학교나 치의학특별수련기관으로 발전시킬 임무를 부여받는 쉐플리는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였다.
먼저 “의학 교과 과정에 치과학 강의가 늘어나고 치과에 여러 졸업 후 과정이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1917년 6월 14일 보고서)”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서는 1913년부터 4년제로 지정된 의학생들에게 충분한 임상실습을 제공하기 위해 1914년부터 인턴 수련제도를 도입하였다. 쉐플리도 치과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졸업 후 과정’으로서 치과의사 조수를 뽑는 수련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치과의사를 수련하기 위해서는 치의학 이론교육과 치과기공 및 임상치료실습이 필요했다. 쉐플리는 선교본부에 교수요원 충원과, 기공과 임상실습이 가능한 특수진료실을 설비를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구강분야의 수술과 이론을 강의하고, 임상 및 기공수행을 감독할 교수가 절대적으로 보강되어야 했다. 쉐플리는 치과학 교실이 선교본부의 재정지원 없이도 독립적으로 치과의사를 양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국인 의사 중 1-2명을 매년 수련시켜 미래 교육을 위한 표준모형을 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제의 지방관립병원인 자혜병원 절반에 치과의사가 배치된 것처럼, 각 지역의 선교병원에 치과수련을 마친 치과의사들을 배치시켜 장차 한국인들을 위한 치과의학교의 교수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세브란스연합의학교가 전문학교가 되고, 총독부의 지정을 받을 수 있도록’ 세브란스 이사회의 결정에 충실하게 따르기로 했다. 세브란스 이사회 역시 ‘의학과 치의학 졸업생을 위한 치과 분야의 수련과정 잘 운영하는 것을 현명한 방법(1918년 6월 보고서)’으로 생각했다. 1908년 에비슨이 이또 히로부미 통감을 만나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을 수 있도록 협의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쉐플리와 세브란스 이사회는 총독부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지정하게 되면, ‘일본관립치과대학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치과대학이 생길 수 있으며, 세브란스에서 치과전문수련교육을 받으면 총독부가 주관하는 치과의사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낙관(1917년 6월)’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쉐플리로서는 ‘총독부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처럼 경성의학전문학교(1916)의 치의학 교육 대상을 의대생으로 국한하도록 한(1917년 6월 보고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총독부는 치과학을 의학 교육의 한 분야로 만들 것”으로 오해했다. 미국 카아네기 재단 이사장 프리쳇(Henry S. Pritchett)역시 ‘1910년대 중반까지 치의학 교육이 의학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하느냐, 분리된 시술집단으로 남아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고 가이스(Gies)보고서 서문에 적고 있다.
요컨대 쉐플리와 세브란스이사회는 총독부의 치과의사 관련 시행령들이 ‘일본인 치과의사와 입치사, 거류민 보호’위주의 식민지 치과의료정책에 의해 시행이 유보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총독부는 서양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의과대학에 치과가 확대 독립해 한국인 치과의사가 양성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쉐플리는 1916년 치과수련의 지원자들 중에 한 명을 뽑았다. 1914년 세브란스연합전문의학교를 졸업한 최주현이었다. 쉐플리는 그에게 ‘가능한 한 완전한 과정을 이수하게 해주고, 점차 한국인 환자를 보는 일을 배정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쉐플리의 수련과정을 통해 전공 뿐 아니라, 서로 약간의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쳐 줄 것으로 기대했다. 또 치과수련과정을 마치면 총독부의 시험을 치르게 한 후, 병원에서 일을 하든가 지역에서 개업하여 성공하도록 도울 계획이었다. 1917년 유칠석(1916년 의학교 졸업)도 치과수련의로 합류하였다. 1917년 3월에 관립병원에서 일본인 치과의사로부터 3년 반 동안 배운 또 다른 한국인도 조수로 들어왔다. 쉐플리는 한국인들은 기술이 좋기에 소독과 치료에 관한 체계적인 강의와 특수훈련을 하면 훌륭한 치과의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1917년 9월 이후에는 하루에 2시간 동안 조수들의 모든 일들을 감독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최주현은 2년간 치과수련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았다. 하지만 총독부는 ‘동경치과대학실습과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험을 불허’했다. 결국 최주현은 군산에서 일반의로 개업하고, 다른 후배들은 치과수련을 포기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쉐플리는 선교본부에 치과의사와 교수 몇 명을 더 보강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관계자들은 치의학교 설립의 가치를 다양한 기관의 지도자들에게 설명하여 호의와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무단정치기 총독부는 조선에 치과의학교의 설립이나 치과의사 시험을 실시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에서 치과조수수련을 마친 의사조차 치과시험자격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무단정치기 조선 내 치과의사는 한국인 2명, 일본인 7명, 미국인 2명뿐이었다. 그와 달리 입치사는 1914년 55명에서 1920년 249명으로 5배가량 늘어났다. 그 중 조선인 입치사는 100명 가까이 배출되었다. 즉 무단정치기 총독부의 치과의료정책은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은 억제하고, 일본인 입치영업자를 보호하는 선에서 한국인 입치영업자의 진입을 허용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쉐플리 과장 시기의 진료와 연구

쉐플리는 미국 치과대학 부속진료소를 모델로 한 치과진료실을 정비하였다. 1916년부터 방사선 촬영을 하고, 1917까지 최신 전기 엔진이 내장된 4대의 철재치과유닛췌어를 갖췄다. 기공은 기공사 2명에게 맡겼다. 1914년 총독부 치과가 4대의 목재치과유닛췌어와 족탑엔진으로 시작한 것보다 기자재면에서 우수했다. 족탑엔진은 1870년대에 미국에서 발명되고, 전기로 돌아가는 핸드피스는 1905년에 개발되었다. 하지만 일본 본토에서도 전기드릴이나 엔진은 매우 드문 상태였다.
시술범위는 간단한 보존과 발치에서 시작하여, 보철, 교정, 악안면 수술까지 구강의 전범위로 확대했다. 구강국소감염설에 의한 소동에 대해서는 ‘근첨까지 밀봉하는 신경치료’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환자의 대부분은 한국인이고, 외국인과 선교사 가족 환자들은 소수였다. 하지만 진료수익의 상당 부분은 외국인 개인진료에서 충당되었다. 초기에는 무료 환자의 비율이 높았으나, 환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무료의 비율을 떨어졌다. 진료비를 일반병원의 수가에 준해서 받았다.
1918년부터 미국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한 일본인 치과의사 미시나(三品敬吉)가 조수로 고용되어 의대생 강의와 외국인 진료를 했다. 영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인 치과의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에 올 때 본토의 1.5-2배 가량의 봉급을 받기 때문에 미시나 교수의 봉급이 지출 내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1919년 들어 쉐플리는 운산광산이나 소래 포구 같은 임시진료소 등에서 선교사와 가난한 한국인들을 치료하면서 치과의료선교에 대해 더 많은 보람과 가치를 느꼈다.
조사 및 연구는 목적에 따라 한국인과 외국인 선교사 집단을 분리했다.
한국인 구강상태에 관해서는 일상적인 식생활과 부정교합 발생, 영구치 맹출과 발육 통계에 관한 연구를 계획하였다. 또 올바른 양치법과 구강병에 관한 대중 교육책자도 발간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가난한 선교사들이 구강치료를 받기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치과진료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는 선교본부에 방사선 촬영을 동반한 구강검진과 치료비를 보조할 집단구강보건관리 예산을 요청했다. 항생제가 없던 시기 방사선 촬영은 구강농양의 위험을 판단할 수 있는 획기적인 진단기구였다. 191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학교, 보험회사, 자선단체 등에 집단구강검진과 치료기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1916년 뉴욕에서 치과위생사 학교가 개교했다. 특히 군대에서 구강병은 지원자를 탈락시키는 두 번째 질병이어서, 군인 500명당 1명의 치과군의관이 배치되었다.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쉐플리도 징병위원회에 병적등록을 다시 승인받아야 했다. 쉐플리는 치과의료선교에 예산지원이 안되면, 군의관으로 입대할 각오로 선교본부를 설득해냈다.
하지만 쉐플리가 가장 큰 관심을 갖는 내용은 빠르게 변하는 치의학 지식과 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1920년 11월 안식년을 맞은 쉐플리는 대학원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1920년 12월 쉐플리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5년간의 짧은 기간이었다.

 

 

3. 에비슨의 치과의학교 설립안이 한국에 끼친 영향

1921년 5월 에비슨은 쉐플리에게 편지를 했다. “후임을 구하기 어렵고, 자신이 세브란스 치과 과장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쉐플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니 다시 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쉐플리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원한다면 개업을 처분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답장을 했다. 에비슨은 쉐플리의 복귀를 선교본부에 요청하였다. 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 교실의 후임으로 부츠(J. L .Boots)가 와 있었고, 맥안리스(J. A. McAnlis)는 한국에 오고 있는 중이었다. 1921년 7월 초 에비슨은 총독부에 치과의학교 설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1921년 7월 5일자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서는 「齒科醫專門學校 에비슨씨가 50萬圓을 내어 설립한다고 해」, 「齒科醫專申請」이라는 머리기사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에비슨이 조선에 치과의학교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50만원의 자금으로 3개년의 치과의학교를 설립하려 한다. 학생은 조선인을 본과생으로 하고, 일본인은 청강생으로 입학시키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는 에비슨의 치과의전문학교의 설립 청원을 보류하였다. 에비슨의 교육기구 확장은 총독부의 학사행정을 앞지르는 일이어서 허가하지 않았다. 총독부로서는 “미국인이 대학의 설립에 선수를 친 것은 조선 민중에 대한 일본의 위신과 면목을 떨어뜨리는 일”이고, “조선인들이 조선인 치과의사에게 치료를 받음으로써 일본인 개업가에 타격을 입힐 것도 우려”했기 때문이다11). 총독부는 에비슨과 미국 선교의사들이 정규치의학교를 설립하지 못하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 대신 이에 따른 대안을 만들어야 했다. 총독부는 치과대학을 설립하지 않고 입치사들이 시험을 통해 치과의사가 될 수 있는 조선치과의사시험규칙(1921)을 선포하였다. 이에 총독부치과의사시험위원장(1921.8)을 맡게 된 나기라(柳樂達見)는 치과의사강습소의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나기라의 경성치과의사강습소 설립원서가 경기도청 학무과에 계류 중(1921. 11)일 때, 학무과장 노부하라 세이(信原聖)는 치과의학교로 변경해서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나기라는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와 함께 경성치과의학교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1921. 12)해, 인가(1922.4)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치과의료 교육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쥐려는 일제의 식민지 의료정책에 의해 에비슨의 치과의학교 설립안은 묵살되었다. 그러나 에비슨의 치의학교 설립안(1921)은 이후 경성치과의학교를 설립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Ⅲ. 결론


일제강점기인 1915년 11월 쉐플리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 교실을 개설했다. 이는 무엇보다 한국인에게 과학적 치의학 교육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당대 미국의 최신식 치과진료장비와 진료기술을 갖추고 외과에서 독립된 구강진료의 필요성도 제기하였다. 한국인의 구강건강 특성과 외국선교사들에 대한 집단구강관리도 연구되었다. 의대졸업생 치과조수수련은 총독부의 치과의사법 관계 규정을 변화시키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쉐플리는 자신의 봉급을 갹출해서라도 치과학 교실 발전 비용을 마련하자고 주장할 만큼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치의학교 설립이나 치과의사 수련인정에 대한 실제적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안식년을 맞아 대학원 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다. 다음 해 에비슨은 쉐플리의 복귀를 요청했다. 쉐플리는 “후임자가 구해지지 않거나 치의학교 설립에 필요하면 언제든지 치과개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할 정도로 충실한 태도를 견지했다. 1921년 7월 에비슨의 치의학교 설립 청원은 총독부에 의해 다시 보류되었다. 이와 비교해 선교치과의사 린드세이와 하버드 출신 치과의사들에 의해 1916년에 치과학 교실로 세워진 서중국연합대학(West China Union University)은 1921년 중국 최초의 구강학교로 발전하였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치의학교 설립 노력이 좌절된 것은 일제 총독부의 방해가 주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치의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고 근대치의학 교육이 발전하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이를 억압하고 식민지 통치에 유리한 방향으로 통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은 치의학교 설립과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한국 근대치의학 교육의 도입을 촉진하였다.
이와 같은 쉐플리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역사적 의의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개설된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었던 미국의 치의학문과 진료기술을 소개하고, 치과의사 수련 및 연구를 통해, 치의학문의 위상을 높였다. 일본인 치과의사와 입치사들의 보철물을 남발하는 상업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독립적으로 윤리적인 진료풍토를 조성하여 한국인들에게 구강건강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치과의사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둘째, 쉐플리의 해외선교치과의사 지원은 치과의사로서 더 많은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려는 기독교 신앙과 직업적 사명감에 입각한 것이었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인 치과의사들이 극동아시아에 진출하였다. 그 중 조선과 중국에 온 선교치과의사들은 치과학 교실 설립을 통해 치의학 교육 부분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 치의학 교육 사업은 치과후발국이 자립적인 치과의료 재생산 체계를 구축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사업이다.

셋째, 쉐플리가 도입한 치의학 교육은 기초 및 일반의학교육을 강화한 치의학 이론과 임상수련 및 기공실습을 통해 치과의사로서의 전문적 역량을 키우는데 필수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한편 쉐플리가 시도한 치과수련의제도는 치과대학이 없었던 당시에는 총독부 치과의사법과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 억제정책에 의해 좌절되었다. 하지만, 에비슨의 치의학교 설립 제안은 경성치과의학교 설립의 촉진제가 되었고, 이후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이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특별 수련기관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차세대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치과의사들을 양성해내었다.

넷째, 일제의 식민지 치과의료 정책 하에서도 쉐플리는 한국인의 구강에 대한 연구와 내원환자에 대한 기초 통계, 선교치과의사들의 치과진료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집단구강관리사업의 도입, 방사선 촬영을 통한 신경치료 수련 등을 통해 당대 가장 발전된 근대 치의학 교육체계를 도입할 수 있었다.  

 

= 참고문헌 =


1. Montgomery, M. L. Historical and biographical annals of Berks County, Pennsylvania: embracing a concise history of the county and a genealogical and biographical record of representative families. Chicago,  J. H. Beers, 1909;1427.
2. William J. Gies, Dental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New York, The 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 1926;47.
3. 조영수, 20세기 초반 미국의 치의학 교육 개혁과 구강과 운동, 대한치과의사학회지, 2004;23(1):57-72.
4. Lennmalm H, World’s History and Review of Dentistry-From the most reliable and authentic resources available, a compendium of facts and historical data regarding the dental profession, Chicago, W.B. Comkey Company, 1894: 조영수, 일제하 조선의 근대적 치과의업과 식민지배, 인제대학교 대학원 인문의학과 의사학 전공 박사학위 논문, 2010.
5. C. H. Howard, Student Power in World Mission, Downers Grove, IVP, 1979;972.
6. 白石保成, 朝鮮衛生要醫, 京城, 1918;75 : 조영수, 일제하 조선의 근대적 치과의업과 식민지배, 인제대학교 대학원 인문의학과 의사학 전공 박사학위 논문, 2010.
7. 이주연, 조선시대말과 일제 식민지 시기의 서양식 치과의료의 도입에 관한 고찰, 연세대학교 대학원, 1998:26-34 : 한국 근현대 치과의료체계의 형성과 발전, 서울, 도서출판 혜안, 2006
8. W. J. Scheifley, Severance College Dental Department, The Korea Mission Field, 1916; 12(2):44.
9. William F. Vann, Jr., D.M.D.,M.S., Evolution of the Dental School Curriculum-Influences and Determinants, Journal of Dental Education, 42(2):66.
10. 쉐플리, 「미북장로교 선교보고서」, 1917. 6. 4.
11. 佐藤綱藏, 이충호 역, 「에비슨의 종합대학 설립설」, 『조선의육사』, 형설출판사, 1993;53-117.